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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병 환자 - 몰리에르

by 민시원 2020.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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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띠스뜨 뽀끌랭/몰리에르: 상상병 환자(1682). Changbi Publishers

 


창비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몰리에르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 직접 극단을 만들고 극작품을 썼다고 했다. 자연히 본명은 크게 알려지지 못했다. 장바띠스뜨 뽀글랭. 「상상병 환자」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자신이 직접 만든 작품의 주인공 아르강을 연기하다가 무대에서 쓰러지고, 그대로 집으로 옮겨진 뒤 사망했다는 소개를 읽은 뒤론 작품의 무게가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수명이 긴 일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어도, 언젠가 펜을 잡지 못하게 되는 순간까지 창작을 하는 일은, 그 원천이 끝나지 않는 한 계속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그것은 몰리에르에게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에 덧붙여 그는 자신의 꿈인 연극배우를 이루려 했고 그래서 그 꿈의 무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노쇠한 연주자의 음악을 숨죽여 듣었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고요한 무대 위에서 연주자의 숨소리가 장악을 한 무대에서. 떨리는 손길을 그대로 느껴야 했다던 관객들이 느꼈을 카타르시스를 상상하게 되었다. 희극을 쓴 그의 마지막 생은 무대 위처럼 희극의 순간으로 끝이 났을까. 섬찟한 두려움이 일기도 하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을 「상상병 환자」의 마지막 관객이 되어 극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엄숙한 기분에 휩싸여 있던 관객을 몰리에르는 쉽게 두고 보지 않았다.

 

 

 

 

 

 

 

 몰리에르의 희극은 끊임없이 웃음을 유발한다. 장치이든, 대사이든, 행동이든 무엇을 가리지 않고 전부를 이용해서. 순회공연을 하면서 체득한 민중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한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이 연극의 소명이다.'라고. 덕분에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을 시간은 없다. 위기와 긴장을 주려 하다가도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은 해학과 풍자가 가득하다. 어느새 루이 14세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했던 고리타분한 느낌은 날아가버리고 없다. 책을 읽으며 혼자 실실거리고 있는 것이 참 이상해 보이겠지만 뭐 어떠랴. 혼자 방안에 누워 피식거리는 웃음을 짓고 있다가도 결국 마지막까지 그의 의지를 다하고 떠난 몰리에르의 대단함에 감탄하게 된다.

 

 말과 무대와 춤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적용과 장난스러움이 무대를 장악하는 듯하다. 바이올린이 무슨 소리를 내고 있는지. 바이올린 연주자들과 입씨름을 하는 배우의 소리는 어떠한 것인지 궁금해지고 만다. 글로 읽고 감동을 마음에 안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 연극을 실제로 보고 싶어 졌다. 생생하게 상상이 될수록 그 마음은 더욱 커져갔다. 

 

 특히나 눈길이 가고 웃기는 장면만을 부러 꼽았다. 어깨를 털듯 무거움을 걷어낸 몰리에르의 극을 더욱 생동감 있게 한 것은 번역의 힘도 있지 않을까. 「상상병 환자」 옮긴이의 재치가 글에서 묻어난다. 신이 나서 잔뜩 비틀고 꼬집어 대는 모습 그대로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하는 표현들은 폭소를 유발한다. 꿱꿱꿱꿱꿱꿱 몇 마디 말로 넘기는 페이지와 욕설이 그대로 나타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마치 눈앞에서 무대가 펼쳐지는 것 같다. 몰리에르와 함께 이들을 비웃고 한없이 가벼워진 권위가 끌어내려지는 모습이 선연하다. 

 

 

 

 

 

 

 

 

 생생한 날 것의 웃음이 담기고 있지만 그 속 알맹이가 없다고 하면 참 아쉬운 소리일 것이다. 경관들은 길에서 소란을 피우는 뽈리시넬을 잡는다. 연행되는 것을 막으려는 뽈리시넬은 용서를 빌지만 돌아오는 것은 돈을 내놓지 않으면 매질을 받으라는 엄포다. 순순히 보내줄 생각을 결국 없다. 두들겨 맞은 후에야 쉽게 보내주지 않을 것임을 안 뽈리시넬이 항복을 하며 장면은 끝이 난다. 이 한 장면까지도 몰리에르는 쉽게 보내지 않고 웃음과 비꼼을 가득 담았다. 신나게 떠들어대고 무대를 장악하던 뽈리시넬은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세속적으로 물들기만 한 경관의 본질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등장하지 않는 뽈리시넬은 단지 이 장면만을 위해 무대에 올랐다. 상상병 환자에서 그의 자리가 비어진다 한들 큰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몰리에르는 이 인물을 무대에 올려 보냄으로써 또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 내었다.

 

 극을 사로잡고 있는 메인 스토리 역시 생각해볼 만한 주제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딸의 결혼은 이용될 수 있고 딸은 그를 위해 복종해야 한다는 무지막지한 가부장적 모습의 아르강이 등장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오히려 콧방귀를 뀌게 된다. 그리고 그건 그의 딸 앙젤리끄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고리타분한 집안을 휘두르는 권력과 과거에 얽매이는 풍습을 해쳐나가고자 하는 '그 당시의 현대적 모습'을 앙젤리끄와 끌레앙뜨가 보여준다. 물론 이들을 가장 크게 돕는 하녀 뚜아네뜨의 공적은 말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이다. 어떤 위기도 재치 있게 해결해나가려는 그녀의 모습에서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가 비치는 것 같다.

 

 

 

 상상병 환자를 만든 것은 걱정과 의심이 많은 아르강, 그의 본질적인 성향일 수도 있지만 그를 더더욱 부추겨온 자질 없는 의사들의 공이 가장 컸을 것이다. 대뜸 한 달간 먹어온 알약의 수를 세는 아르강의 모습에 어딘가 단단히 아픈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관장을 해대는 모습에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들이 어떤 것을 치료라고 생각했을지도. 자신의 말을 절대 권위처럼 생각하는 의사들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의심하는 환자들에게 저주를 퍼부어댄다. 마치 종교집단이 이단자를 몰아내듯 비판을 했다는 각주를 읽으며 머리가 멍해졌다. 도저히 보편의 정의, 윤리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긴 한 건지 의심이 가는 현대의 의사 집단의 모습이 수백 년 전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너무도 부끄럽고 안타까움을 만들어냈다. 마치 신이 된 것처럼 절대적인 믿음과 지지를 유도하고 스스로의 권력을 나서서 공언하는 이들의 모습이 제자리걸음을 해온 세월이 하릴없이 덧없게 느껴졌다. 상상병 환자를 만들어 낸 건 누구인가. 상상을 깨고 나서야 하는 건 누구인가.

 

 

 

 

 

 

 

 

 배우들이 숨은 쉬고 있는 것인지 보고 있는 내가 다 숨 가빠지는 대사의 향연도 아주 볼만한 재미거리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티키타카는 어떻게 활용하냐에 따라 격한 분노의 표현이 될 수도, 치열한 말싸움이 될 수도, 끝내주는 합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인물 간의 격렬한 합의 끝에는 감정의 고조가 뒤따라온다는 것은 동일하다. 골머리 앓을 필요 없이 읽는 대로 웃어대며 마음껏 그들을 뜯어볼 수 있게 함에 통쾌함이 느껴진다.

 

 정말이지 완벽한 뒤엎음을 만들어낸 결과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딘가 어색하고 묘하게 뒤틀린 결과가 오히려 속 시원한 기분을 만들어준다. 욕을 해도 시원치 않을 상황이 답답할 때 속에 있는 걸 그냥 모조리 잊어버릴 수 있게 하는 유쾌함이 가득하다. 항상 무거운 진지함만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니 한 번은 시도해봐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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