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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거짓된 삶 - 엘레나 페란테

by 민시원 2020.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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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 페란테: 어른들의 거짓된 삶(2020). 한길사

 


 

 

 

 

 어른이 되는 것에 단계가 있다면, 내게 그 단계는 의지와 상관없이, 불쑥불쑥 찾아오곤 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꼭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채 받아들이게 되는 사실들에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는 정도.

 

 마냥 행복한 것과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던 모습들이 '일반'과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는 조금 충격이었다. 그저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이 작고 좁은 울타리 안에서 곱게 키운 꽃처럼 자라기만 했다는 것을 순식간에 깨우칠 수 있는 강력한 충격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와 같지 않은 너와 이들 사이에 순식간에 존재하게 된 - 사실 눈치채지 못했던 - 장벽이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사는 실제로 아무것도 몰랐을 내 모습은 어떤 차이를 느끼게 했고 그것이 간격을 벌려놨겠지 싶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님을 알고 있다. 의도치 않게 소외를 시키고 소외를 당했음에도 나는 전혀 원망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되려 정말 편히 생각하고  그것에 머물렀던 지난날들이 떠올라서 부끄러울 뿐이다. 행여 당연하게 여기며 그들에게 난데없는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또 의도치 않게 속없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었는지.

 

 

 

 

 

 

 

 하지만 따스한 나의 사람들은 그것으로 나를 욕하지도 탓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저 한 곳에 조용히 뭉쳐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고 함께 뜨거운 눈물을 나눴다. 우리의 차이가 우리의 관계를 망쳐놓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자 이제는 기묘한 두려움이 밀려들어왔다. 내 주변에 그런 것들이 더 눈에 띌수록 나는 이기적 이게도 우리 가족에게 돌아와 머릿속으로 의심과 걱정을 품기에 바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렸던 나의 생각 속에서는 불행의 씨앗이란 어딘가 모르게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실 너무도 평범하게 일상을 가장하고 우리 곁에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 뿐인데.

 

 그래서 나는 조반나처럼 영악해지기로 했다. 조반나와 닮은 행동을 했다는 게 맞겠지. 항상 문득문득 지나가는 가벼움에 실어서 가장 벼르고 별러내 날카로움을 숨긴 조각들을 던져 놓아 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가슴은 언제나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이 두 방망이질 쳤다. 영겁과도 같았던 시간이 흐르고 별 대수롭지 않은 대답이 돌아오면 깊게 안도하다가도 슬금슬금 의심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병이다. 정말로, 감당하지도 못할 걸 알면서도 무얼 그렇게 알고 싶어 하는 건지 진짜 알고 싶긴 한 건지 확신하지도 못하면서 그냥 한 번 돌을 던져보고는 마는 것이다. 그것의 파장이 너무 커져 파도가 되어 덮쳐오면 공포심에 꼼짝 못 하게 될 것 임을 알면서도 위험한 호기심을 멈출 수가 없다. 나는 무엇을 듣고 싶었던 걸까. 내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는 있을까. 온전하게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진심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진심이라고 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의심을 품고 혼자 상상을 하고 고민하고 절망에 빠지는 것을 반복하게 된 것은 나를 혼자 두고 사랑하는 친구들이 그들끼리만 성장해버렸다는 느낌을 받은 뒤부터다. 모두 다 같은 생각에 철없는 말을 주고받고 실없는 행동을 하고 다니는 줄만 알았는데, 다 각자 조금씩 다른 역할로 우리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털어놓는 얘기에 더욱 당황했던 것은, 그들의 눈빛이 내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형용할 수 없는 모든 감정들을 겪고 돌아온 어딘가 지친듯한 또 어딘가는 체념한듯한 '진짜 어른'의 눈빛 같았다.

 

 그 눈을 보며 나는 아직 그것을 받아들여본 적이 없어 그전까지는 영원히 어른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상상을 했다. 그 순간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대응을 할 것인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떻게 행동하고... 그러면서 또 나는 아마 이겨내지 못하고 영혼이 완전히 회생 불가능한 수준으로 망가져 버릴 것이다 하는 두려운 생각만 잔뜩 하고 말았다.

 

 지금의 행복에 하나 도움될 것도 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언젠가 혹시 모를 끔찍한 순간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기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덜 받고 싶어서 오늘도 계속 상상을 한다. 그리고 조반나가 이다를 만나는 장면을 본 이상 나는 또다시 그 굴레를 기다리게 된다는 기분이 든다. 피할 수 없고 그것이 진정으로 어른이 된다는 관문이라는 착각에 빠져든다.

 

 

 

 

 

 

 

 나는 어지러운 조반나를 보며 머릿속으로는 나의 집을 상상한다. 나의 친구를 상상하고, 나의 두려움에 대해 상상한다. 더 이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것이 나를 몰아세우게 될 것인가. 거짓과 끔찍한 것들과 슬프게도 그렇게 어른이 된다는 잔혹한 성장의 이야기는 조반나를 변화시켰지만 내게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듯싶다. 어른답다 라는 게 무엇인가. 결국은 우리 모두, 어른인 우리 모두 미처 밖을 생각하는 마음보다는 결국 나를 앞세워 나의 것을 더 가꾸게 되고 마는 것을. 사랑하는 것들에, 소중한 가족이지만 그만큼 숨기고 감춰온 거짓이 가득한 변함이 없는 어른의 세계가 이어진다.

 

 


 

"잔니나, 네가 내 조카라는 사실을 기억하렴. 네가 나를 부르면, 나는 절대로 너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어른들의 세상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분별력 있는 그들의 머릿속과 지식으로 가득한 그들의 몸 안에서 대체 무슨 일 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무엇이 그들을 파충류보다도 못한 믿을 수 없는 동물로 만들어버린 걸까.

 

"저는 제가 못생기고 못된 것 같아요. 그런데도 사랑받고 싶어요."

 

순간 놀라울 정도로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마치 일동 모두에게 동시에 호흡곤란이 온 것 같았다.

 

나는 부모님 앞에서도, 빅토리아 고모 앞에서도 생기를 잃었다. 내 친구들 앞에서도 내 본모습을 숨겼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도 모르게 진지하게 내 부모님을 염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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