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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뜨 2 - 샬럿 브론테

by 민시원 2020.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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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 브론테: 빌레뜨 2(2020 개정판). Changbi Publishers

 


 

 

 

 

 여러 재미있는 것들에 밀려 항상 후순위로 밀려나 있던 책에, 정말 오랜만에 말 그대로 푹 빠져있는 나를 가장 반겼던 건 엄마였다. 건드려도 대답도 않는 모습에 조용히 책 표지를 보고선 한마디 하셨다. "샬럿 브론테 책이면 초반엔 지루하겠네." 샬럿 브론테의 가장 유명한 작품 「제인 에어」를 읽어보셨던 엄마의 소감이었다. 그 말은 정말로, 초반의 빌레뜨를 읽을 땐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아서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고 나쁜 의미는 아니고 섬세한 샬럿 브론테의 묘사가 낯설게 느껴져서일 거란 생각이 든다. 간결한 것을 즐기고 줄기차게 길어지는 것은 안 좋다 말하는 요즈음에 보기에 그녀의 문체는 한없이 예민하고 세세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

 

 둘레둘레 말하길 좋아하는 작품을 보고 있자면 소설이 아니라 시를 보는 것만 같다. 끊임없는 묘사와 심리, 추측들 속에는 직설적으로 던져내는 것이 없다. 그 말은 「빌레뜨」에는 가파른 경사나 흥분되는 강렬하고 열정적인 빠른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어느 한 구석에 서서 혹은 앉아서 조용히 바라보는 화자, 루시 스노우의 시선을 따라 독자는 서서히 물들어가고 조용히 앉아서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가슴을 알아챌 수 있게 된다.

 

 

 

 

 

 

 

 루시 스노우를 보며 참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원하는 것이 있어도 나서지 못하며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지만 뒷전에 물러나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것은 나였다. 어렵사리 찾아온 인연에 반가워 어쩔 줄 몰라하고, 옛 인연의 말상대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 건 나였으니까. 조용한 줄 알았던 루시 스노우는 철저하게 매일을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모든 힘을 쏟아붓고 있었던 것이다. 설사 셔츠를 만들다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누구보다 주체적인 여성이 그려지고 있는 「빌레뜨」의 루시는 끊임없이 이성을 유지하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시대에서 빌레뜨를 읽고 있는 내가 깨어나지 못한 인물이었다. 일련의 사랑 이야기라고만 생각을 하고 머릿속으로 관계도를 그리기에 바빴다. 독립적으로 살겠노라 생각을 하면서도 벗어날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것들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정곡으로 찔린 듯했다. 흔들리고 불안정해도 자신의 삶을 살고자 했던 루시 스노우의 삶에 반사되는 용기 없는 나 자신은 그저 퇴보를 답습하는 꼴이었다. 얽매이고 미숙한 나는 계속해서 스노우가 안정되고 행복하기를 빌었다.

 

 

 

 

 

 

 

다시 책을 훑어보면 말도 안 된다고 화를 낼 정도로 어찌 그런 생각을 했나 싶다. 여성은 온화하고 수동적이고 평범해야 한다니. 지긋지긋한 구식이 아닌가. 그동안 해왔던 행동거지들을 생각해보자면 화가 날 정도이지만 이 괴팍한 인물도 결국 변할 수 있는 것일까.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가려져 있던 사건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부터는 정말 어찌해볼 도리가 없이 이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불가항력인 것이었다. 이성적으로 결국 홀로 살아온 지난날을 저버리고자 했던 루시 스노우를 퇴보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매번 참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움켜쥐어오기만 했던 그녀가 마침내 감정을 터뜨리고 사람들의 앞에서 울어 보였을 때 나는 그것에서 희열을 느꼈다. 그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목적이 무엇이든 스스로를 소심한 여자라고 칭했던 루시가 자신의 목소리를 어느 때보다 터뜨려 내는 순간이었으니.

 

 

 

 

 

 

 

 루시 스노우가 브레턴 선생과 폴리나의 축복을 말하던 말이 생각난다. 그녀의 눈에 한없이 순탄하리라 보였던 그들, 두 인물을 말하는 스노우에 왜 한없이 슬퍼졌는지 모르겠다. 삶에 굴곡이 있고, 오르내리는 골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한다면 완만하게 사건들을 이겨내고 행복에 겨워하는 이들과 끊임없이 곤두박질치고 힘겹게 올라가는 루시 스노우의 모습이 대조되어서였을까. 마치 하늘이 내려준 약속과 계획과 조화와 같은 아주 극소수의 선택된 이들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담긴 애정에 목이 매인다. 루시는 그들을 질투하지도 미워하지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소중한 인연들에게 말하는 커다란 친절의 말이 부러운 것은 역시 나였다. 비교와 시기 없이 충실한, 진심의 말을 듣고 싶어 졌다.

 

 너무나 좋은 나머지 오히려 말을 조심하여 고르게 된다. 꼭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내가 받아온 감정의 흐름, 생각들조차 어떤 감상의 방해거리가 될까 걱정이 된다. 지루하다고 그냥 덮어버리기엔 너무도 아까운 소설이 아닌가. 백오십 년을 넘어 이백 년에 가까운 시간만큼 멀어진 과거로부터 전해진 이야기이지만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속삭이는 책이다. 홀로 됨을 마다하지 않고 사랑한 루시 스노우, 독자들에게 섬세한 말들로 이야기를 전달한 루시 스노우, 나와 닮은 모습의 루시 스노우. 온종일 함께한 시간이 아깝지 않았고 이야기가 끝이 났음에 하릴없이 아쉬워진다. 나의 이야기를 써내리는 나의 삶에서 그녀같이 가벼이 마지막을 쓸 수 있게 노력할 테니 계속해서 나의 곁에 남아 다정한 친구로 남아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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