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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산사 순례 - 유홍준

by 민시원 2020.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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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산사 순례(2018). Changbi Publishers

 


 

 

 

 

구강포의 푸른 바다, 아랫마을 밭이랑의 검붉은 황토, 보리밭 초록 물결...

... 진초록 동백잎 사이로 점점이 붉게 빛나는 탐스러운 동백꽃,

거기에 산새는 잊지 않고 타고나 땅 답사객을 맞아 주었다.

p. 333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수능특강 문학 파트에서 보던 글 하나가 잊히지 않는다. 나의 지나온 삶 중에서 가장 많은 심적 변화도 있었고, 혼란했고,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생각해볼 수 있었고 인정하게 됐다. 딱 그 시기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어떠한 시간이었다면 그저 스쳐 흘러갔을 글이라 생각도 드는 게 절묘한 그 타이밍에 맞아떨어져 이렇게 나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 듯싶다. 그 글의 제목은 「철산리의 강과 바다」이다. 글쎄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울리는 무언가가 느껴지지는 않는다만 그 당시의 아주 조용히, 작게 가슴이 떨렸다는 그런 기억은 난다.

 

 '그랬었지'하는 그 기억이 끝끝내 길게 이어지더니 꼭 그 세 강줄기를 만나보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휩싸였다. 하나에 꽂히면 제정신을 못 차리고 그리고 또 그리는 성격에 시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그를 보러 갈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들뜨고 설레는 마음이 가득 찬 차 안에서 짧은 글을 다시 되새기며 읽어봤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이들의 실제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땐 어쩐지 조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장소'에 대한 기억과 생각은 어쩐지 끊이질 않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꼽을 수는 없겠지만,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답답함이 내겐 장소에 대한 그리움으로 솟아났다. 

 

 나는 매일 꿈을 꾼다. 뭐 매일을 상상 속에 엄청난 꿈을 그리고 있다는 그런 말은 아니고 말 그대로 매일 밤, 꿈을 꾼다. 어린 시절엔 늘 무서운 꿈을 꾸고 몸서리를 치며 눈을 떴고 요즘은 그냥 정신력이 약하여 그런 것이려니 한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지 않다는 건 일상을 지내다 가끔 꿈이 화젯거리로 떠올랐을 때, 그럴 때 문득 느끼곤 한다. 어느덧 내 삶에서 그냥 익숙한 존재가 되어버린 꿈과 일상을 동반하고 있다 보니 매일의 꿈이 큰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사실 더 이상 그런 것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 되도록이면 그러지 않으려 애쓴다. 그런데 종종 꿈은 재미있는 패턴을 보이곤 한다. 정말 어떤 것을 너무 가지고 싶다 하는 생각이 차오를 때면 그 며칠 중 하루의 꿈에는 그것을 얻어내는 것이 나타나고, 어떤 것을 먹고 싶다 한다면 꼭 같은 것을 먹는 꿈을 꾼다. 방송에 나온 한 정신과 의사가 말했던 현실에 대한 해소를 똑같이 보여주는 것 같아 신기할 따름이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꿈을 꾸면 내가 정말 많이 생각해왔구나 하고 역으로 깨닫기도 한다. 물론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서 슬프게도 무섭게 자리 잡은 인상도 그대로 꿈에 반영되곤 하지만.

 

 여하튼 이 꿈에 언젠가부터 어떤 장소가 나타나곤 했다. 보통은 내가 지나온 공간이 많았는데 공통적인 것은 광활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 것만 같은 트인 공간들이었다는 점이다. 보통은 잠에서 깬 침대 위에서 꿈을 다시 되새기지 않고 잊으려 노력하고 또 그렇게 되는데 이상하게 그 꿈들은 자꾸만 되짚고 싶었고 생생히 기억이 났다. 그 어느 공간을 걷던 상쾌한 마음의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서 그랬던지도 모른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 장소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득 안고 살고 있다 보면 그래도 시간이 흘러 그를 꼭 찾게 되었다. 둘을 꼽아보자면 하나는 높게 트인 댐이었고, 하나는 넓은 공원이었다. 꿈에 그리던 그 모습과 똑같이 무한한 개방감을 느끼진 못했지만 정말 그와 같은 모습들 속에, 실제를 걸으면서 무언가의 해방감을 느꼈다.

 

 

 

 

 

 

 

 나는 그 꿈들이 다시 나를 찾아오길 기다린다. 그러나 그를 꾸던 시기를 생각해보면 참을 수 없는 우울감과 복잡한 마음만이 남아있던 날들임이 떠올라 차라리 바랄 게 없는 지금이 나은가 하고 견주어보곤 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또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내가 찾은 이 곳들이 전부 어린 시절에 자주 찾던 곳이라는 거다. 조금은 무섭지 않은가. 머릿속 어딘가에 깊숙이 들어가 있던 기억이 감정적 신호로 촉발되어 꿈에 그려지고 그게 또 행동을 만들어 지금의 새로운 기억을 만들다니. 

 

 이게 본래 하려던 말은 아니고, 지금까지 서두를 무한히 길게 끌어왔는데 하고 싶었던 말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산사 순례」도 나에게 특별한 장소의 기억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꼭 산사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산사로 향하는 그 길, 걸음에 따라붙는 풍광들의 묘사가 나를 그런 기분에 들게끔 만들었다. 어느덧 장소가 던지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된 지금 나는 또 이 책의 몇몇 곳들을 메모장에 옮겨 적고 있다. 어느 날 나를 괴롭게 만드는 일들에 지쳐버렸을 때 멀리 떠나버릴 어느 목적지를 갖기 위해서다. 

 

 

 

 

 

 

 

 아니 어디 유명하다 하는 절들은 웬 만치 다녀봤고, 꾸준히 걷고 다니는 곳도 있다만 이 책의 목록에는 없다는 게 뭔가 아쉬웠다. 너무 유명한 나머지 기록을 할 만한 가치가 없어져버린 걸까. 이러한 내가 기록을 한다면 그것도 참 지지부진한 책이 될 것 같다는 점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다녀온 수많은 답사의 시간만큼 쌓인 듯한, 나를 이렇게 끌리게 하는 묘사의 기술이 내겐 없으니 말이다. 산사를 순례할 답사객들의 안내서가 되겠다는 친절한 이 책을 책장에 소중히 꽂아 넣고 두고두고 꺼내볼 생각이다. 내게 이런 군더더기 없는 묘사 기술이 쌓일 때까지, 이들 산사를 순례하고 나의 말로 풀어쓴 기록을 완성할 때까지.

 

 

 

묵은 동네 뒷산 솔밭으로는 가볍게 지나가는 봄바람에도

노오란 송홧가루가 황사를 일으키듯 회오리를 치며 멀리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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