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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찾아서 - 정호승

by 민시원 2020.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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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 당신을 찾아서 (2020). Changbi Publishers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나는 늙었다

늙은 어린이가 되었다

p. 35 「또다른 후회」

 

 

 

 사랑한다 그 한마디 전하지 못한 후회를 품고 시인은 늙은 어린이가 되어버렸다.

 

 애교를 가득 담아 쏟아내던 사랑의 말은 끈적하게 묻은 입술의 달고나가 되어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어느 한순간도 다른 이를 사랑하지 않아 본 적이 없다. 부모와 가족을 사랑했고, 친구를 사랑했고, 스승을 사랑했고, 만나는 모든 이들을 사랑했다. 각기 다른 형태와 각기 다른 크기이지만 그 모든 것은 역시 온전한 내 마음이었다. 그러나 왜 지금 나는 이리 목석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는가.

 

사랑하는 마음을 외면하고 싶었다. 상처 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다가오는 사랑을 밀어내 버렸다. 헤어짐이 두려웠기 때문에.

 

 들려오고 보여지는 것들에 집착한 나머지 겁쟁이가 되었고 이렇게 자꾸만 숨어들고 마는 것이다. 괜한 상상력에 부추겨져 단단한 울타리를 세우다 보니 나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당신들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는데, 여기 그대로 남아있는데. 말로 꺼내 보아도 온전히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입을 뻐끔거리곤 한다. 사랑한다고. 늘 사랑하고 있다고. 그 몇 초 안 되는 한마디 말을 꺼내지 못해 안절부절 주저한다. 영원하지 않을 거란 불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계속 이렇게 흘려보내고 마는 실수가 되풀이되고 이젠 더 이상 실수가 아닌 앙금이 되어 다시 나를 아프게 할 것임을 알고 있다. 아마 밤마다 밀려오는 회환이 되겠지.

 

 

 

 

 

 

 

 

꽃이 돌아가시고 겨우내 내가 우는 동안

기다리지 않아도 당신만은 부디

봄이 되어주세요

p. 78 「꽃이 시드는 동안」

 

 

 

후회 속을 걸어가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전하지 못한 사랑의 무게 짓눌려 눈물짓는 나를 신경 말고 봄을 사시길. 

 

 지금보다 더 어릴 땐 인간의 감성을 부정하고 싶었다. 이성적 판단에 따르면 더 나은 선택을 하고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거늘, 감정에 부딪히는 모습이 너무 진부했다. 이래나 저래나 뻔한 결말일 뿐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렇게 감정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똑똑해졌고 다른 것들보다 높은 위치에 서있게 되었지만 다른 것들이 알지 못하는 구슬픈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외로움, 공허함. 안타깝게도 죽음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맨 몸으로 썩어 들어가 분해되는 과정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죽음 앞두고 누웠을 때야 눈에 깃드는 복잡한 감정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인간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것일지 모른다.

 

 결국 인간에게도 종 번식이 가장 우선순위의 의무라는 것을 들었을 때 반발심이 들곤 했다. 복잡한 생활사를 가진 만큼 불완전한 마음을 떠안고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짝을 짓고 자손을 형성하는 것은 더 이상 간단한 일이 아니게 됐다. 동물과 인간이 각기 mating까지 걸리는 시간을 비교한 표를 보고 있자면 더욱 그러함을 느낀다. 내가 생각하고 그리는 삶의 목적은 생물학적 그것과는 다른 형태이다. 그럼에도 잠깐 휩쓸려 있던 시간 동안 꽃은 피어버렸고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또 다른 진부한 삶을 살아가는 나를 사랑하는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지루한 생애의 하루에서 나는 이렇게 봄을 빌 테니.

 

 

 

 

 

 

 

 

묻지 마시게 부디

사랑할수록 사랑을 잃은 내가

무슨 인생의 길이 될 수 있겠는가

p. 145 「시간에게」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표현하지 않음에 전달되지 않은 마음만을 가지고 흘러가는 시간을 살고 있는데 답할 길이 없다. 지나온 길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나 오직 나만이 아는 흔적이 되었지. 사랑할수록 사랑을 잃었다는 표현이 서글프다. 굳이 주저리주저리 이해해달라고 붙들고 늘어지려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를 향한 마음이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또 말을 잃어갈 뿐이다. 세월을 머금은 시인마저 모르는 것을 내가 알 수가 있을 리 없다. 시간만은 알아주길 바랐는데, 계속해서 잃고 있기만 한 것이었다. 결국 이렇게 또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온 것뿐이었노라 중얼거리기만 해 본다.

 

 

 

 

 

 

 

 적나라해서 불편하고 오래된 것이라 낯설다. 그럼에도 그 간극을 좁혀놓은 것은 시인이 보이는 소재들이다. 일상을 파고들어 꼬집어 놓으면서도 함께 글썽이게 만들곤 한다. 술술 너무 쉽게 지나가버리는 시간처럼 시집이 끝을 보이면 계속해서 곱씹게 된다. 반세기의 차이가 나는 나와 시인은 그저 인간으로서 같은 선상에 서있다. 다른 길을 걸었다고 한들 결국 같은 보고 느낄 수밖에 없는 세상 속 존재이다. 담담히 모든 것을 털어내고 떠나려 마지막을 고하는 듯한 제5장의 시들은 지금은 먼 듯 보였던 끝을 가까이 느끼게 해 준다.

 

울지 말라 재차 다독이는 그의 목소리에도

아직도 털어버리지 못한 미련과 짊어진 게 너무 많아 목이 매여온다.

 

 

 

 

 

 

그럼 이만 안녕

나는 무덤이 없으니 부디

내 무덤 앞에서 울지는 마시게

p. 165 「그럼 이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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