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 꽃으로 엮은 방패(2021). Changbi Publishers
창비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는 머릿속에서 끝없는 세상이 펼쳐지지만, 현실이 숨 차오르기 시작할 땐 그조차 사치일 것 같다는 생각. 눈앞에 흘러가고 있는, 흘러가버린 것들을 기록하기가 벅차 삶이 모자란 그런 것 말이다. 아마 곽재구 시인의 삶도 그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덧없이 반복적인 일상에서 덧없이 평범한 것들을 품고 생각하고 고민한다. 어딘가 촘촘하지 못하고 듬성듬성한 빈 구석이 있는 삶이다. 곽재구 시인의 삶은 나와 정반대에 놓인 듯하다. 치열하게 무언가를 향한 마음을 끝없이 토해가는 삶. 그 대상은 '시'다.
온전히 마음을 다해 무언가를 염원할 수 있을까. 뜨뜻미지근한 태도와 삶을 살아온 나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 같다. 물에 물 탄 듯 조용하고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가장 바라는 나에겐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는 일이 두렵다. 그래서 「꽃으로 엮은 방패」는 내겐 어쩐지 부담스럽다. 활활 타오르는 열기에 데어버릴 것 같은 떨림이다.
시인의 시는 직선으로 곧게 뻗어있다. 순수한 마음이 분노가 되기도 하고 다시 초연한 태도로 어딘가를 바라보기도 한다. 강물에 시를 쓰기를 바라고 항구에 앉아 세상의 모든 시를 읽겠다는 시인의 말은(「세상의 모든 시」, p. 40) 결연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에 나는 한없이 작아지는 마음을 애써 끌어안아본다.
그곳이 세계의 끝인가요?
내 눈을 들여다보던 선생님은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나는 어느 추운 겨울날 중강진에 갈 거라 생각했다
「중강진 1」 p.74
그의 시를 눈으로 훑으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게 된다. 과거의 현실은 떠밀려 가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현실은 과거를 좇아가는 일을 계속한다. 잊어버린 것만 같이 흐려지던 기억은 다시 살아나 새 현실을 만들어낸다. 어머니로부터 처음 듣게 된 먼 옛날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머리에 새겨진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고, 먼 훗날의 자신을 북쪽 어드매의 추운 곳으로 발걸음 하게 끌어당겼다. 양말을 몇 겹이다 겹쳐 신어야 할 정도로 차디찬 공간으로. 그러나 추운 그곳에선 어쩐지 가슴이 뛰고 설렘이 물씬 풍긴다.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것과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 맞닿아 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인 걸까.
시집을 관통하여 가로지르는 하나의 이미지, 어머니. 어머니는 펌프 샘 가에서 눈물짓기도 하고 나의 양말을 덧대어 주기도 하고 먼 옛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원치 않은 만남에 시작이 어긋난 듯하였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어느 날 기차역에서 무언에 다짐을 하고 홀연히 떠나가버린 그 순간의 어머니의 모습과 시인은 너무도 닮아있었다. 피할 수 없는, 피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순간에 함께 엮여있던 두 사람이었다.
시인에게 있어 말과 언어는 모두 시를 위한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모국어로만 쓸 수 있는 시는 그의 세상에 전부였다. 정부와 국가에 대해 통렬하게 내뱉는 쓰디쓴 채찍질도 그 역시 삶의 일부를 시로 표현하는 시인만의 산물인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그의 시가 짧게 끊어져버릴 뻔한 사건을 마주하자 어찔했다. 국가를 잃어버린 청년들 앞에서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던 그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무런 보호 없이 내몰린 이들에겐 부러운 모습이었을지언정 쉽게 자부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의 과거가 기억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신춘문예 응모는 의무라고 말해준 이가 없었더라면 그를 마주할 수 있었을까. 종이 위 짧게 쓰인 몇 자의 글에서 차분한 격동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도 시임을, 머릿속 생각에 기반하는 것이 아닌 눈 앞의, 지나간 모든 시간을 토해내는 것이 시임을 아로새겨 준 시집, 「꽃으로 엮은 방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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